칼럼 애터미로 인해 발견한 또 다른 나
애터미로 인해 발견한 또 다른 나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창밖에 내리는지 내 마음에 내리는지 잠시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잠시 과거로 돌아간다. 강원도 산자락에 머리는 바가지 머리를 하고 흐르는 코를 옷으로 얼마나 닦았는지 옷 끝이 반들반들하고 다 헤어져 있는 작은 소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소녀가 바로 나다.
슈퍼에서 파는 50원짜리 깐도리라는 아이스크림이 유일한 나의 낙이였던 것 같다. 더우면 물에서 놀고, 추우면 비료포대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 겁도 없이 하루 종일 미끄럼을 탔다. 지금 같으면 무서워서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을 단숨에 해냈다. 손도 얼고, 발도 얼고 그렇게 집에 들어가면 엄마한테 등짝 한대 맞고 손과 발을 녹였다. 그때의 나. 지긋지긋하게 가난하고 좁아터진 방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던 가족들. 다시 돌아가라고 해도 싫은데 괜스레 오늘은 그날들이 조금은 그리워진다.가난하다는 게 싫었다. 같은 동네에서 이사를 얼마나 자주 다니는지. 가는 집마다 나는 너무 추웠다. 나에게 어린 시절은 그냥 가난이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나는 아마도 가난하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마치 온몸으로 세뇌 당했는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일만 하기 시작했다. 월초에 지갑에 3만 원이 들어있으면 월말에도 그대로 3만 원이 있을 정도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거기서 우뚝 서겠다는 다짐과 함께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엄청나게 경직되어 있었고 유연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행히 여자건 남자건 실력으로만 인정해주는 사장님을 만나 나의 직장 생활은 나에게 보람을 줬고 그렇게 잘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보낸 1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직장을 그만둔 나는 그만두고서야 내가 정말 좁은 세상에서 바보처럼 성공해 보겠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는 생각에 내 젊은 10년이 허무하기까지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은 넓고 너무나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별 보고 출근하고 별 보고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던 나에겐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매달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포기한 건 내 인생에 있어서 신의 한 수였다. 그 이후로 열심히 다른 일을 찾고 있었다. 그때 운명처럼 만난 게 애터미였다. 다른 프랜차이즈들과는 다르게 자본이 들지 않았고 제품을 써보니 너무 좋았다. 마감이 없다는 말에 호기심으로 시작했고 잠시 해보고 문제가 있으면 바로 그만두겠다던 나는 아직도 애터미 사업에 홀딱 빠져서 열심히 현장을 누비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직장 생활만 하고 남자들이 주로 많았던 기계 쪽에 일했던 나는 너무도 딱딱한 사람이었고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속이 시원한 스타일이었던 거다. 이런 성향은 사업을 힘들게 했고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했다. 애터미 사업 이전에는 내가 나를 그렇게 바라볼 이유도 없었고 나에 대해 알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애터미 사업은 나 자신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순간 마치 사춘기처럼 정체성의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직장 생활 잘 하던 나에게서 찌질한 나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보는 일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인정해야만 했다.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렇게 성장통을 겪기 시작했다. 변화와 성장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이성연 박사님의 강의를 반복해서 듣고 스폰서님을 찾아가 나의 구체적인 성향을 묻고 바꿔야 할 것들을 하나씩 체크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스폰서님은 나를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고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나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시점이. 그때 읽은 책은 그냥 글씨가 아니었다. 나를 바꿔줄 도구였기에 무한정 집중해서읽어댔던 것 같다. 데일리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수없이 읽고서야 그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애터미 사업을 왜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애터미로 인해 또 다른 나를 발견했으며 그건 아주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해줄 것 같다. 내가 애터미를 만나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 나이가 들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마 꽉 막힌 40대중반의 꼰대 중에 상꼰대가 되어 있었을 것 같아서다.
애터미 사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배운 것은 단연히 감사와 겸손함이다. 처음 감사한 걸 찾으라고 했을 때는 뭘 감사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했던 내가 이제는 숨 쉬고, 살아있고 따뜻한 밥 한 공기에도 감사의 마음을 담을 수 있게 되었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재수 없는 사람은 되지 않을 것 같아 안도의 마음을 갖는다. 나는 애터미 사업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했다.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그 실수와 실패가 나에게 영양분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남들보다 사업의 속도가 조금 느려도 일이 안되는 기간이 좀 길게 느껴져도 부지런히 실패라는 씨앗에 물을 주고 있다. 양질의 실패의 씨앗은 분명 임계점을 만나면 누구보다도 멋지게 쑥 쑥 자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이것조차 신기방통하다. 나는 한 번도 자발적으로 글을 써서 남에게 내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이 모든 행동이 애터미 사업을 시작한 이후 나에게 찾아온 변화다. 나는 이 변화를 계속 즐길 생각이다. 나와 함께 애터미사업의 매력에 푹 빠질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나는 오늘도 현장을 누비며 바람이 불어도 전진할 것이다.
슈퍼에서 파는 50원짜리 깐도리라는 아이스크림이 유일한 나의 낙이였던 것 같다. 더우면 물에서 놀고, 추우면 비료포대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 겁도 없이 하루 종일 미끄럼을 탔다. 지금 같으면 무서워서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을 단숨에 해냈다. 손도 얼고, 발도 얼고 그렇게 집에 들어가면 엄마한테 등짝 한대 맞고 손과 발을 녹였다. 그때의 나. 지긋지긋하게 가난하고 좁아터진 방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던 가족들. 다시 돌아가라고 해도 싫은데 괜스레 오늘은 그날들이 조금은 그리워진다.가난하다는 게 싫었다. 같은 동네에서 이사를 얼마나 자주 다니는지. 가는 집마다 나는 너무 추웠다. 나에게 어린 시절은 그냥 가난이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나는 아마도 가난하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마치 온몸으로 세뇌 당했는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일만 하기 시작했다. 월초에 지갑에 3만 원이 들어있으면 월말에도 그대로 3만 원이 있을 정도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거기서 우뚝 서겠다는 다짐과 함께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엄청나게 경직되어 있었고 유연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행히 여자건 남자건 실력으로만 인정해주는 사장님을 만나 나의 직장 생활은 나에게 보람을 줬고 그렇게 잘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보낸 1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직장을 그만둔 나는 그만두고서야 내가 정말 좁은 세상에서 바보처럼 성공해 보겠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는 생각에 내 젊은 10년이 허무하기까지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은 넓고 너무나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별 보고 출근하고 별 보고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던 나에겐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매달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포기한 건 내 인생에 있어서 신의 한 수였다. 그 이후로 열심히 다른 일을 찾고 있었다. 그때 운명처럼 만난 게 애터미였다. 다른 프랜차이즈들과는 다르게 자본이 들지 않았고 제품을 써보니 너무 좋았다. 마감이 없다는 말에 호기심으로 시작했고 잠시 해보고 문제가 있으면 바로 그만두겠다던 나는 아직도 애터미 사업에 홀딱 빠져서 열심히 현장을 누비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직장 생활만 하고 남자들이 주로 많았던 기계 쪽에 일했던 나는 너무도 딱딱한 사람이었고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속이 시원한 스타일이었던 거다. 이런 성향은 사업을 힘들게 했고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했다. 애터미 사업 이전에는 내가 나를 그렇게 바라볼 이유도 없었고 나에 대해 알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애터미 사업은 나 자신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순간 마치 사춘기처럼 정체성의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직장 생활 잘 하던 나에게서 찌질한 나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보는 일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인정해야만 했다.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렇게 성장통을 겪기 시작했다. 변화와 성장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이성연 박사님의 강의를 반복해서 듣고 스폰서님을 찾아가 나의 구체적인 성향을 묻고 바꿔야 할 것들을 하나씩 체크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스폰서님은 나를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고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나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시점이. 그때 읽은 책은 그냥 글씨가 아니었다. 나를 바꿔줄 도구였기에 무한정 집중해서읽어댔던 것 같다. 데일리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수없이 읽고서야 그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애터미 사업을 왜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애터미로 인해 또 다른 나를 발견했으며 그건 아주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해줄 것 같다. 내가 애터미를 만나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 나이가 들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마 꽉 막힌 40대중반의 꼰대 중에 상꼰대가 되어 있었을 것 같아서다.
애터미 사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배운 것은 단연히 감사와 겸손함이다. 처음 감사한 걸 찾으라고 했을 때는 뭘 감사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했던 내가 이제는 숨 쉬고, 살아있고 따뜻한 밥 한 공기에도 감사의 마음을 담을 수 있게 되었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재수 없는 사람은 되지 않을 것 같아 안도의 마음을 갖는다. 나는 애터미 사업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했다.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그 실수와 실패가 나에게 영양분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남들보다 사업의 속도가 조금 느려도 일이 안되는 기간이 좀 길게 느껴져도 부지런히 실패라는 씨앗에 물을 주고 있다. 양질의 실패의 씨앗은 분명 임계점을 만나면 누구보다도 멋지게 쑥 쑥 자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이것조차 신기방통하다. 나는 한 번도 자발적으로 글을 써서 남에게 내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이 모든 행동이 애터미 사업을 시작한 이후 나에게 찾아온 변화다. 나는 이 변화를 계속 즐길 생각이다. 나와 함께 애터미사업의 매력에 푹 빠질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나는 오늘도 현장을 누비며 바람이 불어도 전진할 것이다.
최배귤 다이아몬드 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