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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한길, 그리고 애터미 그 성장의 역사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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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길, 그리고 애터미 그 성장의 역사를 돌아보다
연재에 들어가며
첫걸음은 신용불량자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에게 호언장담했던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현실로 만들어가며 애터미는 이제 1조 매출을 넘어서는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섰다. 어떻게 그리고 무엇이 애터미를 성장시킬 수 있었는가? 그 한가운데에는 애터미 최고의 브랜드이자 아이콘인 박한길 회장이 있다. 박한길 회장이 애터미를 어떻게 창업하고 성장 · 발전 시켰는지 그 과정을 연재한다.
Part3 원점으로 돌아가다
아이엠코리아닷컴(im-korea.com)의 실패로 박한길 회장은 가진 재산을 다 날리고 월세방을 전전하는 신용불량자 신세가 됐다. 뿐만 아니라 한창 일해야 할 40대 중반에 당뇨와 간경화로 거의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엠코리아닷컴에 가지고 있던 얼마 되지 않던 재산은 물론이고 건강까지도 남김없이 모조리 쏟아 부은 것이다. 그렇다고 병석에 누워있을 처지도 아니었다. 큰아들의 아르바이트 수입도 생계에 보태야 할 정도로 아내의 수입으로는 근근이 생활하기도 바빴다. 사실 이 당시 박한길 회장이 병상에 누웠다면 지금 대한민국 네트워크마케팅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애터미도 박한길 회장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잃은 것도 많았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가장 큰 깨달음은 실패는 혼자만의 아픔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엠코리아닷컴의 실패는 당장 박한길 회장의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엠코리아닷컴의 성공을 위해 함께 일하던 임직원은 물론 외부 협력업체에게까지 피해를 끼쳤다. 그때의 심정을 박한길 회장은 “사업에 실패한다는 것은 죄악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다시는 실패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만에 하나 실패를 해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대책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애터미의 창업이념 가운데 첫 번째가 ‘생존’인 것도, 협력업체에게 납품 즉시 현금 결제라는 파격적인 결제조건을 고수하는 것도 다 이때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박한길 회장이 아이엠코리아닷컴의 실패로 닥친 어려운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실패에 전혀 너그럽지 않은 사회에서 건강마저 악화된 박한길 회장으로서는 재기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신앙생활에 힘쓰면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마음을 비워서일까? 박한길 회장의 건강은 아주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몸을 추슬러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 뭐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어떻게든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박한길 회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理想)에 가까운 회사를 찾기 시작했다. 대개는 사업을 하면서 본인이 찾는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정확한 개념 없이 찾아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을 대신해 좋은 회사를 찾아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한길 회장의 이상인, 좋은 제품 싸게 팔면서 비용을 줄여 사업자와 나누는 회사는없었다. 결국 박한길 회장은 온전히 회복되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직접 회사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쫄딱 망했던 박한길 회장이 만든 회사인지라 처음에는 보잘 것 없었다. 변변한 사무실 하나 없이 박한길 회장이 직접 물건을 떼어 오면 사업자들이 약간의 마진을 보고 판매했다. 매일같이 물건을 떼고 판매하며 함께하는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는 가운데 회사는 조금씩이나마 성장하고 있었다.
Part 4 콜마비앤에이치와의 만남
하루는 박한길 회장이 TV를 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기존 화장품보다 100배나 좋은 화장품을 개발했다는 뉴스를 접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박한길 회장은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전화를 했다. 다름 아닌 100배나 좋은 화장품을 어떻게 한 번 팔아볼 수 없을까, 하는 요량이었다. 파는 것은 자신 있었다. 더군다나 소위 명품이라는 화장품보다 훨씬 좋은 화장품이라면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보란 듯이 팔아 국위 선양도 하고 외화도 벌어들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대리점권이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앞섰다.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개발한 화장품을 팔아보고 싶다는 박한길 회장의 말에 한국원자력연구원은 반색을 하며 찾아오라고 했다. 부리나케 달려간 박한길 회장에게 한국원자력연구원은 대뜸 잘 팔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바로 김치봉 콜마비앤에이치 대표에게 연락해 놓을 테니 가서 직접 얘기하라고 했다. 콜마비앤에이치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기술을 투자하고 콜마가 자금을 투자해 설립한 국내 1호 연구소기업이었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좋은 제품 만드는 설비와 노하우는 있어도 판매 잘하는 노하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몇몇 회사들이 판매해보겠다고 뛰어들었지만 헤모힘을 월 500박스 팔기에도 바빴다. 당시 헤모힘은 한번 라인을 돌리면 최소 생산 물량이 3000박스였다. 그러다 보니 재고는 늘어가고 경영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그 좋은 제품들이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창고 속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연구소기업이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좋은 제품을 잘 만드는 것은 잘하지만 잘 파는 것은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품을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만들어진 제품을 잘 파는 것도 중요하다. 판매도 개발이나 생산 못지않게 중요한 ‘기술’인 것이다. 제품만 잘 만들면 소비자들이 알아서 몰려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아무리 좋은 제품도 팔리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김치봉 콜마비앤에이치 대표를 만난 박한길 회장은 판매에 대해서는 염려 붙들어 매라고 했다. 대신 가격을 조정하자고 했다. 김치봉 대표는 난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재고가 쌓여 있다고는 하지만 박한길 회장을 잘 아는 처지도 아니었을 뿐더러 담보나 보증금도 없었다. 그저 많이 팔아 줄 테니 믿고 제품을 달라고만 하니 덮어놓고 그러마, 하기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덮어 놓고 안 된다고 하기에는 재고 부담이 만만찮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김치봉 대표는 재고 떨이하는 심정으로 승낙했다. 어차피 쌓여 있는 재고, 팔지 못하면 폐기 비용도 만만찮으니 밑져야 본전 아니겠냐는 계산이었는지도 모른다.
Part 5 판매망을 확충하라
제품을 팔아보겠다고 장담은 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당시 박한길 회장은 아이엠코리아닷컴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빈털터리에 건강까지 악화돼 새로운 일을 크게 벌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한국원자력연구원과 김치봉 대표에게 판매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시라고 큰소리까지 쳐놨기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열심히 팔아보는 것 외에는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 끝에 박한길 회장은 네트워크마케팅 시절 알던 지인들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줄잡아 수백여 통의 전화를 돌렸지만 반응은 시원찮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네트워크마케팅은 소비 기반 확보를 통해 장기적인 비전을 보기보다는 투기에 가까운 베팅 등으로 단기간에 수익을 내고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회사도 그랬고 사업자도 그랬다. 그런 상황에서 판매를 기반으로 하는 박한길 회장의 의도는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또 어쩌다가 만나러 온 사람도 변변찮은 사무실을 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 당시의 박한길 회장은 사무실 하나 제대로 꾸릴 여력도 없었다. 물론 박한길 회장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몇몇 사람과 박한길 회장은 죽을 둥 살 둥 헤모힘과 화장품 판매에 매달렸다. 그러던 차에 전북 익산에 사업을 할 만한 사람을 모았다고 내려와서 사업설명회를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차가 없었던 박한길 회장은 주머니를 탈탈 털어 중고차 하나를 구입, 익산으로 향했다. 번듯한 장소를 빌릴 여유도 없었던 터라 문 닫기 일보 직전인 음식점에서 사업설명회를 했다. 음식점에 도착해 보니 음식점 주인을 비롯해 재료를 납품하던 사람, 대리운전 기사 등 열일고여덟 명이 앉아 있었다. 박한길 회장은 성치도 않은 몸으로 네댓 시간 동안 열변을 토했다. 사실 그 당시 박한길 회장의 말은 얼핏 들어도 허무맹랑한 얘기에 불과했다. 100배 좋은 화장품이라는 말은 그렇다 쳐도 언제 퍼질지모를 중고차를 타고 와서 텅 빈 음식점에 20여 명을 모아놓고 익산에서 가장 크고 비싼 아파트에서 살게해주겠다거나 글로벌로 진출해 세계적인 유통 기업이 되겠다는 말은 현실과 동떨어져 보였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한 사람은 “열정과 호기는 높이 샀지만 박한길 회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며 “하지만 원자력연구원에서 개발하고 콜마에서 생산하는 제품이라면 판매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여담이지만 그때 그 자리에 모인 사람 가운데 애터미 사업을 꾸준히 한 사람은 모두 연 소득이 수억원 이상이 됐다. 문 닫기 일보 직전의 음식점에서의 사업설명회에 모인 사람들의 거의 네트워크마케팅을 접해보지 않았거나 아주 잠깐 접해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거의 대부분은 신용불량자였다. 이들은 그저 한 달에 몇 개 팔면 얼마 남는다는 단순한 계산 끝에 콜마비앤에이치의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만 얼마의 수입이 무엇보다 절실했기에 앞뒤 안 가리고 판매에 열중했다. 이들의 열정 때문인지 다행히도 제품을 한 번 써본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고 재구매가 꾸준히 일어나며 판매량도 따라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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