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톨스토이의 물방앗간 이야기
톨스토이의 물방앗간 이야기
글_이성연 애터미경제연구소장
인류의 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자신이 뭘 모르는지를 모르고, 자신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바보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자신이 가장 똑똑한 사람인 것처럼 으스대는 것을 무지라 하고 교만이라 한다.
톨스토이의 저서 《인생론》 중 서론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물레방아에 의한 제분기(製粉機)를 생활의 유일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 어떤 사나이를 상상해본다. 이 사나이는 제분소의 아들 또는 손자이므로 마음대로 가루를 빻으려면 물레방아의 각 부분을 어떻게다루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는 기계학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가루가 알맞게 잘 빻아지도록 손수 기계장치를 잘 조정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우연한 일로 이 사나이가 제분기의 구조에 관해서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기계의 구조를 물어서 막연한 설명을 듣게 된 결과, 그는 무엇이 기계를 빙빙 돌게 하는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밀을 넣는 깔때기에서 절구통으로, 절구통에서 축으로, 축에서 바퀴로, 바퀴에서 수문(水門)으로, 수문에서 수로라는 순서로 점점 관찰을 진전시켜 나갔다. 마침내 모든 것이 둑과 시내에 의존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그는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나이는 이 발견을 매우 기뻐했다. 그때까지 해온 것처럼 가루의 성질을 검사하여 절구를 오르내리거나, 절구통을 닦아서 접촉이 잘 되도록 하거나, 벨트를 조이거나 늦추거나 하는 것을 중지하고는 개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물방아는 완전히 고장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자네는 잘못된 짓을 하고 있다고 주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에 항변하고는 개울에 관한 연구만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개울만을 너무 오래 열심히 생각하여 그의 사고방식이 옳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사람들과 너무도 매우 열심히 과격하게 언쟁하였기 때문에 마침내는 개울이 결국 물방아 그 자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자기의 사고방식의 착오를 지적하는 모든증명에 대해서 사나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어떠한 물방아 라도 물이 없이는 가루를 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방아를 알려면 물을 대는 방법을 알고 그 흐름의 힘과 그것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 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물레방아를 알려면 개울 그 자체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톨스토이가 《인생론》 서두에서 물레방앗간 이야기를 도입한 것은 인생의 연구가 그 목적에서 벗어나 말단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들은 마치 물레방아 자체를 논의하는 것과 개울이 다를 바 없다고 톨스토이는 지적했다. 우리는 톨스토이의 물방앗간 이야기로부터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지적 편식(知的偏食)에 의한 기형적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지극히 편협한 지식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인 양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대롱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管見]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무식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외는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지성은 이걸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둘째,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데는 시스템적 사고가 요구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조직 또는 개인이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여러 가지 변수들이 관여 되어 있다. 그런데 다른 변수들은 고려하지 않고 어떤 하나의 변수만을 극대화 또는 극소화하려 하는 경우 형편없는 대안을 선택할 수가 있다. 마치 물레방앗간 사나이가 물레방아가 작동하는 시스템을 도외시한 채 시스템을 구성하는 어느 한 가지에만 집착하다 결국 시스템이 망가져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논리는 애터미 사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합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를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부분에 대하여 진실인 것을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전체에 대해서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구성의 모순 또는 합성의 오류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부분에 대하여는 좋은(맞는) 것이 전체적으로는 좋지 않은(틀린) 현상을 말한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구성의 모순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이 사회는 합성의 오류로 가득 차 있다. 만일 합성의 오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 간의 갈등도 미미할 것이다. 모두 자기 좋을 대로 하면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합성의 오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조직 운영도 매우 단순할 것이다. 애터미 사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합성의 오류는 반드시 존재한다. 누군가가 배팅을 하면 당분간 자신에게는 이익이 될지 모르나 결국은 시스템이 망가져 버려 모두가 몰락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실로 아는 것이다 (True knowledge exists in knowing that you know nothing). 인류의 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자신이 뭘 모르는지를 모르고, 자신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바보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자신이 가장 똑똑한 사람인 것처럼 으스대는 것을 무지라 하고 교만이라 한다.
소크라테스는 또 말한다. 유일한 선은 앎이요 유일한 악은 무지이다(The onlygood is knowledge and the only evil is ignorance). 모든 악행은 무지로부터 출발한다.
일부 애터미 사업자들이 저지르는 악행도 그 뿌리는 무지다. 무지와 유식은 보유한 지식의 양을 기준으로 정의되는 개념이 아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를 기준으로 정의된다. 다시 말하면 교만한 사람이냐 겸손한 사람이냐를 기준으로 정의된다. 겸손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사업성공도 못하고 애터미 시스템에도 큰 부담을 주게 된다. 겸손은 신사·숙녀가 되는 밑바탕이다.
그런데 우연한 일로 이 사나이가 제분기의 구조에 관해서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기계의 구조를 물어서 막연한 설명을 듣게 된 결과, 그는 무엇이 기계를 빙빙 돌게 하는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밀을 넣는 깔때기에서 절구통으로, 절구통에서 축으로, 축에서 바퀴로, 바퀴에서 수문(水門)으로, 수문에서 수로라는 순서로 점점 관찰을 진전시켜 나갔다. 마침내 모든 것이 둑과 시내에 의존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그는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나이는 이 발견을 매우 기뻐했다. 그때까지 해온 것처럼 가루의 성질을 검사하여 절구를 오르내리거나, 절구통을 닦아서 접촉이 잘 되도록 하거나, 벨트를 조이거나 늦추거나 하는 것을 중지하고는 개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물방아는 완전히 고장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자네는 잘못된 짓을 하고 있다고 주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에 항변하고는 개울에 관한 연구만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개울만을 너무 오래 열심히 생각하여 그의 사고방식이 옳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사람들과 너무도 매우 열심히 과격하게 언쟁하였기 때문에 마침내는 개울이 결국 물방아 그 자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자기의 사고방식의 착오를 지적하는 모든증명에 대해서 사나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어떠한 물방아 라도 물이 없이는 가루를 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방아를 알려면 물을 대는 방법을 알고 그 흐름의 힘과 그것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 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물레방아를 알려면 개울 그 자체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톨스토이가 《인생론》 서두에서 물레방앗간 이야기를 도입한 것은 인생의 연구가 그 목적에서 벗어나 말단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들은 마치 물레방아 자체를 논의하는 것과 개울이 다를 바 없다고 톨스토이는 지적했다. 우리는 톨스토이의 물방앗간 이야기로부터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지적 편식(知的偏食)에 의한 기형적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지극히 편협한 지식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인 양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대롱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管見]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무식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외는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지성은 이걸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둘째,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데는 시스템적 사고가 요구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조직 또는 개인이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여러 가지 변수들이 관여 되어 있다. 그런데 다른 변수들은 고려하지 않고 어떤 하나의 변수만을 극대화 또는 극소화하려 하는 경우 형편없는 대안을 선택할 수가 있다. 마치 물레방앗간 사나이가 물레방아가 작동하는 시스템을 도외시한 채 시스템을 구성하는 어느 한 가지에만 집착하다 결국 시스템이 망가져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논리는 애터미 사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합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를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부분에 대하여 진실인 것을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전체에 대해서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구성의 모순 또는 합성의 오류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부분에 대하여는 좋은(맞는) 것이 전체적으로는 좋지 않은(틀린) 현상을 말한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구성의 모순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이 사회는 합성의 오류로 가득 차 있다. 만일 합성의 오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 간의 갈등도 미미할 것이다. 모두 자기 좋을 대로 하면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합성의 오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조직 운영도 매우 단순할 것이다. 애터미 사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합성의 오류는 반드시 존재한다. 누군가가 배팅을 하면 당분간 자신에게는 이익이 될지 모르나 결국은 시스템이 망가져 버려 모두가 몰락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실로 아는 것이다 (True knowledge exists in knowing that you know nothing). 인류의 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자신이 뭘 모르는지를 모르고, 자신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바보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자신이 가장 똑똑한 사람인 것처럼 으스대는 것을 무지라 하고 교만이라 한다.
소크라테스는 또 말한다. 유일한 선은 앎이요 유일한 악은 무지이다(The onlygood is knowledge and the only evil is ignorance). 모든 악행은 무지로부터 출발한다.
일부 애터미 사업자들이 저지르는 악행도 그 뿌리는 무지다. 무지와 유식은 보유한 지식의 양을 기준으로 정의되는 개념이 아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를 기준으로 정의된다. 다시 말하면 교만한 사람이냐 겸손한 사람이냐를 기준으로 정의된다. 겸손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사업성공도 못하고 애터미 시스템에도 큰 부담을 주게 된다. 겸손은 신사·숙녀가 되는 밑바탕이다.